SNS를 켜는 순간 우리는 수많은 ‘망신쇼’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의 실수 영상, 말실수 캡처, 싸움 장면, 거리에서의 난동, 무지한 발언의 폭로… 이런 콘텐츠들은 항상 가장 먼저 떠오르고, 가장 많은 댓글과 조회수를 끌어모으며,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두고 웃고 비난하고 논쟁한다. 우리는 어느새 습관처럼 그런 콘텐츠를 클릭하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감정을 던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행동을 반복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잃어간다. 누군가의 수치를 소비하는 문화, 그것을 통해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느끼는 심리,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되는 왜곡된 공동체 감각은 모두 디지털 시대의 정서적 빈곤을 반영하는 증상이다.
우리 안에는 타인의 고통에 끌리는 본능이 존재한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사고 현장을 지나칠 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불행과 고통은 본능적으로 주목을 유도하고, 인간은 그 주목을 통해 자기 안전을 재확인하거나, 때로는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에서 이 본능은 ‘콘텐츠’라는 형태로 체계화되고, 클릭 수라는 보상으로 강화되며, 결국 타인의 수치심이 수익이 되는 구조로 고착된다. 문제는 이것이 점점 더 악화된다는 데 있다. 단순한 실수로는 부족해지고, 더 자극적이고, 더 폭력적이며, 더 심각한 인격 살인이 될 정도의 망신 콘텐츠가 되어야만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남을 망신주는 장면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정작 그런 콘텐츠를 소비한 후의 감정은 대부분 허무하거나 씁쓸하다. 일시적인 자극은 남지만, 진짜 공감이나 위로, 만족은 없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그런 영상들을 많이 본 날, 스스로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의 뇌는 상대의 고통에 반응하게 설계되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면, 그에 대한 감정 반응이 무뎌지고, 결국 나중에는 타인의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게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는 정서적 마비를 일으킨다. 더는 진심 어린 공감이 힘들고, 누군가의 실수에 이해보다는 조롱이 먼저 나가고, 결국 인간관계에서도 진실함이 점점 사라진다. 우리는 혼자가 되어가는 동시에, 그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망신쇼를 찾아 헤매게 된다. 악순환은 그렇게 반복된다.
하지만 여기서 전환점이 생긴다. 인간은 그 어떤 존재보다도 공감 능력이 뛰어난 종이다. 그리고 그 공감은 단순히 감정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누군가를 회복시키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며, 무너진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실수를 이해할 수 있고, 누군가의 수치심을 감싸줄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한 번의 실패로 사람을 단정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디지털 공간이 인간성을 소진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회복시키는 공간이 되려면, 우리는 먼저 ‘무너진 사람을 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조롱이 아닌 침묵, 비난이 아닌 이해, 확산이 아닌 삭제, 이것이 가능한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실수를 통해 성장하고, 수치를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그렇기에 실수를 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수했을 때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었느냐다. 모두가 등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단 한 사람이 “괜찮아, 너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준다면, 그 사람은 다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수치심에 휩싸인 사람을 향해 뿌리는 시선이 그를 숨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시 나올 수 있게 도울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을 매일, 스크롤을 내리는 그 짧은 찰나에 하고 있다. 그렇게 디지털 공간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지옥도 될 수 있고, 회복의 땅도 될 수 있다.
여기서 아가페적 사랑의 시선이 등장한다. 그것은 판단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매우 실용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조롱하는 그 사람은 언젠가 우리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실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실수를 누군가가 ‘안아줄 준비가 된 사람’이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단 한 번의 반응으로도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존재다. 망신이 아닌 존중, 노출이 아닌 보호, 조롱이 아닌 기다림, 그것이 사람을 진짜로 변화시킨다.
디지털 시대에 아가페적 사랑은 더 이상 고귀한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매우 필요한 행동 방식이며, 인간다움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함부로 소비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살아남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치부를 함께 감싸줄 때, 그 사람은 다시 사회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 연결이 지속될 때, 우리는 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결국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의 피드에 무엇이 보이는가?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선택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수치심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위대한 행동이 아니다. 그냥 스크롤을 멈추고, 댓글을 달지 않고, 공유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렇게 작게 시작된 변화가 사람 하나를 살리고, 세상을 조금 더 인간적으로 만든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성 회복은 기술이 아닌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태도의 중심에는, 언젠가 나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겸손과, 누군가가 그때 나를 안아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더 자주, 우리의 손끝에서 시작된다.